雨宮処凛さんのコラムやマガ9学校のゲストとしてもお馴染みのイェダりんことイ・イェダさんの連載コラムが、フランスから届きました! 果たして「亡命者」の日々は、楽しいのか? 大変なのか? そのリアルな生活を綴ってもらいます。コラムは、ハングルも同時併記していく予定です。
*ちなみにリベルテ(liberté)とは、フランス語で「自由」。フランス共和国の標語である「自由、平等、友愛」(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の一つであり、その起源はフランス革命にあります。
(最終回)
兵役拒否の難民認定者が誕生、そして・・・。
前回のコラムから今までに起こったこと
約4ヶ月前の2016年11月22日、この覚えやすい日に、私の子どもが生まれた。名前はナム(※1)と名付けた。文字通り、木のような人に育つよう願いながら。名前を付けるときは、フランス語でも発音でき、かつなにか意味のある良い名前を探そうとたくさん悩んだ。フランスでは子どもが生まれた日から3日以内に名前を付けないと罰金があるらしく、3日間ヒヤヒヤしながら、最後の日に名前を付けることができた。
ベッドで寝ているナム
ナムの母親とは約1年前、パリで行われたsolida会(※2)で出会った。彼女とは恋愛観や結婚観がよく合い、個人的に何度か会ううちに恋人の関係になった。それからナムが生まれた。
(※1)ナム:韓国語で「木」という意味
(※2)solida会:「アジアの自由と民主主義のための連帯の会」:日本人、韓国人、ベトナム人、フランス人を含め、国籍を問わず様々な人たちが参加。
ナムが生まれたこと以外にも喜ばしいニュースがもう一つある。JPD(徴兵制反対のための市民集会)(※3)で一緒に活動している安悪喜(アン・アキ)さんを通じて去年5月に出会ったイ・ジフン(仮名)さんが、兵役拒否を理由としてフランス政府から難民認定されたとの連絡が来た。私以外にも難民申請を認められる人が現れることを待ち望んでいたので、連絡が来た当日、すぐに約束を取りつけて、夕方ごろにジフンさんが住んでいるパリ郊外のバーで待ち合わせすることにした。
(※3)JPD(徴兵制反対のための市民集会):2015年1月、イェダさんが二度目の来日時に、元「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ベ平連)の高橋武智さんと横浜で対談。そこに同席したアン・アキ氏が、ベ平連が行った亡命支援活動を知って感銘受け、法律家らに呼びかけて設立した団体。韓国の徴兵拒否者らのための海外亡命の助言を行い、相談窓口にもなっている。
ジフンさんのこと、JPDの活動のこと
約一年ぶりの再会だった。ジフンさんは私に白ワインを飲もうと提案し、“2verre de vin blanche s’il vous plaît (白ワインを二杯お願いします)”とフランス語で直接注文をした。Blanc(ブラン)をBlanche(ブランシェ)と言ったぐらいのミスはあったが、この間フランス語の勉強も頑張ったのだなということがわかった。
乾杯をしてお互いの近況を報告し合った後、ジフンさんがある書類を取り出した。自分が約4年前にもらったものと変わったところはなく、細かく読むまでもなく、それがどんな書類なのかわかった。ジフンさんの難民認定を知らせる書類だった。まもなく、彼は10年間の滞在許可証を受け取るはずだ。
私が東京でアンさんらに出会って以来、亡命申請際の書類や、フランス当局とのやり取りなどをもとに、JPDは亡命認定の判断基準を綿密に分析した。フランスだけではない。私の事例が韓国で報道されると、多くの人々が様々な国に亡命を試み、各地から連絡が寄せられた。他にも、すでに亡命が認められていたが今まで知られていなかった人からの連絡もあった。実をいうと、亡命に失敗した人も沢山いた。JPDでは関連資料を回収し、その理由を分析し、あらたな亡命希望者に助言した。
私自身もヨーロッパ各国の市民団体や政党に招待され、韓国人徴兵拒否者らの現状や難民認定の可能性について話し合った。スイスで行われた国連人権委員会に誘われ、韓国政府代表者宛に改善を求める発表も行った。
この過程ですでに多くの人がJPDの助言を受けて、いくつかの国に渡っている。私たちが把握する以外に、個人単位で国外脱出を試みた人は数百人もいることが昨年の韓国政府発表で分かった(2015年5月の聯合ニュースより)。
そして韓国政府は、昨年末から帰国していない徴兵対象者の個人情報や国内住所をインターネットにて全公開し始めた。残された家族などに圧力をかけるためであろう。韓国にある私の実家にも、特別司法警察官(2012年から施行中の韓国の徴兵忌避者摘発目的の特別警察制度)と思われる人らが訪れたという。
こうした背景のもと、ジフンさんは我々の助言で送り出した中では難民認定を受けた最初の事例だ。もっと言うと、その直後、国名や詳細は公表できないが数人の難民認定者が現れている。より多くの人が亡命できるよう願って2014年に日本に行き、外国人記者クラブで記者会見をしたことなどを考えれば、嬉しいことだ。社会的にも大きな変化があったと聞いている。
パリには多くの難民申請希望者が集まっているが、知り合いや友達の力を借りずに衣食住を一人でまかなってきた人を見たのは、ジフンさんが初めてだ。彼は今、ある韓国人宿泊施設で働きながら生計を立てているそうだ。そんな彼だが、今の仕事につく前には野宿も経験している。パリに到着してしばらくの間、あまりの難民希望者の多さに難民申請の手続きさえできずに暮らし、揚句の果てに持ってきたお金が底をつき、野宿を決心したという。
パリではホームレス達が住んでいるテントをよく目にする。SDF(Sans Domicile fixé)と書いてある。「居住地なき(人)」という意味。
野宿をするうちに、自分と似たような状況の人々とも親しくなったそうだ。美味しそうなパーティー料理を用意して晩餐会を開催する野宿仲間から、招待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もし難民として認められなければ、このままここに住んでもいいとも思ったという。「衣食住も解決できて、仲間たちは自分を受け入れてくれる」。ジフンさんの言葉は、十分に共感できるものだった。
しかし、苦しい時期がなかったわけではない。人生初めての野宿で体調が悪くなり、無理やり眠りにつくこともあったという。
難民申請の際の面接審査はどうだったのか気になった。質問の中には、その人の主張の信憑性を確認するため、意地悪なものがいくつかあったそうだ。ジフンさんは自分の宗教に関して、「キリスト教徒はみんな兵役を拒否するんですか?」という質問を受けたという。韓国のほとんどのキリスト教徒はむしろ、兵役義務が平和のために必要だと思っている。この質問を受けたジフンさんの戸惑いは相当のものだっただろう。
ともかく、兵役拒否を理由とした難民がまた一人誕生。しかも、自分の顔が世間に知られることを避けることができたにもかかわらず、兵役拒否権改善の活動に一緒に乗り出してくれるという。
そんな彼に、韓国の現在の情勢についても聞いてみたが、意外にも、「韓国人に対してなんの期待もしていないし、韓国についても思い出すことはない」と、否定的な答えが返ってきた。これは私が勝手に思ったことだが、彼には韓国に対する恨めしさがあるのかもしれない。ジフンさんは「自分らしく自分の国にいたいだけなのに、そうしようとすると(徴兵拒否を理由に)監獄に行くことになるし、様々な不利益を我慢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言いながら、怒りと悲しみが混ざったようなため息をついた。自らの言語と文化を諦め、難民として国を離れるということは、元の場所では自分が自分として生き続け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る。
私は、これから移民者として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イ・ジフンさんに、移民者の権利など知っている限りの情報を伝え、彼と別れた。
子どもを巡って
話はまた戻るが、最近、ナムと私たちにとってつらい出来事があった。
ナムが子ども社会福祉団体であるASE(Aide Sociale à l’Enfance)という施設へ送られたのだ。ナムが生まれた病院が、私たち夫婦を子どもにとって危険な親だと判断してASEに報告したからだ。ASEは公的に、様々な暴力(物理的、心理的、放任など)に晒される危険性のある子どもたちを守る仕事を担っている。病院などの機関だけではなく、匿名の情報提供者からでも、報告があれば子どもを施設に送るための手続きが進められる。情報提供者の言葉を最優先にしながら、実際に子どもがリスクに晒されているかを確認するための長い手続きを経ることになる。このような不当なやり方を経験し、ASEについて調べて見たが、親の67%が、子どもの収容は不当であり、望まない監禁だと答えていた。 私はASEよりも、ナムが生まれたpitié salepêtrier病院に腹が立っている。彼らが私たちをASEに報告した根拠は以下の通りである。
・3日間子どもに会いに来ていない
・父親が抑圧的
私が3日間ナムに会わなかったのは事実である。
私は出産予定日の前に3週間の休暇をとって、ナムが生まれた時から休暇が終わるまで、それこそ面会時間いっぱい(病院で寝ることができたら当然そうしたが)、一日も欠かさずにナムに会いに行った。
しかし、休暇がほとんど終わろうとするころ、母と妹が私に会いにフランスにやって来た。韓国を離れて以来4年ぶりの再会だったうえ、滞在日数が長くなかったので、私は彼女たちに会うために病院に行く時間を割か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
ナムは生物学的な父母だけが入ることのできる新生児室にいたので、私は病院関係者に、母と妹が来る数週間前から、彼女たちも新生児室に入れるよう特別許可をお願いしたが、結局かなわなかった。そのせいで、私の家族がナムと一緒に過ごせた時間は1時間にも満たなかった。規則は規則というのも素っ気ないと思うが、仕方ないとは思った。
だが、私が異議を唱えたいのは、病院側の対応である。私は、時間の都合上、家族の新生児室への訪問を許してくれなければ、ナムに会いに来られないかもしれないと病院側にちゃんと説明をしていた。その点について、病院関係者は十分理解を示し、頻繁に病院に来られなくても自分たちが子どもの面倒を見るし、何かあったら連絡すると言ってくれた。そんな彼らが、いかなる理由であれ3日間子どもに会いに病院に来ていないからと、私を危険な親と判断したのだ。
ナムの母親は、産後うつはもちろん、体調も悪くなっていて、出産直後なので、立っているのもやっとということも多かった。オムツ替えや入浴など、子どもの世話は立ってやらないといけないため、私はできるだけそうしたことを母親に代わって担当しようと努めた。のちに、病院側が私を抑圧的だと判断した根拠をASEから聞いたが、体調の優れない母親への配慮として、また、ナムの父親としての役割をちゃんと果たすためにとったその行動を、病院の関係者たちは、「父親が子どもを独り占めし、母親の役割を妨害しながら抑圧」していると判断したのだ。
病院では、産婦を徹底的に観察しなければならない義務があるという。ナムの母親もその観察の対象であって、看護師が義務的に、何の気なしに放つ「うつ病と関連付けられた質問」(フランスでは産後うつは自然のことのように扱われている印象を受けたが)のせいで疲れていて、また、怖がってもいた。
ナムの母親が受けた質問の中で、誰が聞いてもひどいと思える質問を一つ書くと、ナムの姓についての無分別な質問がある。ナムの姓は母親の姓であるパク「朴」をつけてパク・ナムだ。看護師は母親に、なぜ子どもに父親の姓を付けないのかと聞きながら(そもそも子どもに誰の姓を付けようと、その人に何の関係があるだろうか)、「あなたは二番目の妻か?」と聞いたのだ。
あとでASEから聞いたが、結婚もせず、子どもに父親の姓を付けない私たちを、病院側は関係の悪い夫婦だと思っていたそうだ。当時は理由もわからなかったが、いつからか病院側が私たちを親としての資格がないと判断しているような気はしていた。父親の姓を付けないことで人種差別的な発言(母親の姓をつけるなんて、あなたたちユダヤ人なのか?)やフランス文化至上主義的な発言(フランスは父親と母親の姓を両方付けるが、なぜ母親の姓だけをつけるのか?)を受けたが、私はのちに、病院側が私たち夫婦の行動について部分的にのみ判断し、否定的に記述した書類を見ることになった。
責任感がなく権威的な病院に腹が立ったが、私は下手に行動し、ナムが強制収容され、誰かに養子縁組されてしまう事態を招くことを警戒した。だが、じっとしている気はない。
「リベルテ:Liberté」(自由)を探すためにフランスにいるが、自由のために立ち向か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まだたくさんある。難民として認められたイ・ジフンさんも、むしろ韓国に帰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事実が実感され、以前にもまして心が落ち着かないという。私も理不尽なことや不確実なことが差し迫ると怖いし消耗するが、これからもそうしたことに立ち向かえる人間として生きていきたいと思う。
最後に
読者の方々へ。私のコラムを読んでいただいて誠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連載を続けたいという気持ちはまだありますが、能力が気持ちに追い付かず、なかなかコラムを更新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ここに最後のコラムを残し、感謝の気持ちを伝えます。マガジン9の皆様にも、このような私にコラムを連載できる機会をくださって、誠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リニューアルされるマガジン9も期待しております。
また会える日が来るよう願いながら、みんなお元気で!
翻訳:黄 天秀/鄭 康烈/金 成河)
高橋武智さんとイェダさんの対談。2015年1月3日、横浜中華街で (撮影:アン・アキ)
*
지난회 기고 이후 최근에 있었던 일
– 내 아이가 태어났다. 약 4개월 전인 2016년 11월 22일이 생일이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울 듯한 날에 태어났다. 이름은 ‘나무’ 라고 지었다. 말 그대로 나무(木)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프랑스식 발음으로도 문제없이 발음되고, 의미도 있으면서, 예쁜 이름을 찾으려다 보니 출산전부터 많이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뒤 3일 동안 마음 졸이다가 (프랑스에서는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3일 이내로 이름을 짓지 않으면 벌금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침대에 누워서 자는 나무
나무의 엄마하고는 1년전쯤 파리에서 solida 모임을 만드는 첫 집회에서 만났다. 그 후 다자연애, 결혼은 쓸모 없는 것 등의 가치관이 잘 맞아서 개인적으로 몇 번 만나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아이를 갖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나무가 태어났다.
(※)일본인, 한국인, 베트남인, 프랑스인을 포함 국적불문하고 ‘아시아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회’다. 일본의 안보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집회도 함께 했다.
– 나무가 태어난 것말고도 기다려 온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다. JPD(징병제 반대를 위한 시민 모임)로 함께 하는 안악희 씨를 통해 상담을 받고 난민신청을 결정, 작년 5월에 만난 이지훈(가명)씨가 병역거부를 사유로 난민인정이 되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JPD
이지훈씨와 JPD의 활동
난민신청중인 사람들이 인정되기를 기다려왔기에 연락이 온 날 곧장 약속을 잡아서 저녁에 이지훈 씨가 살고 있는 파리 외곽의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의 1년만에 만나는 거였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자고 제안하며 내 동의의사를 확인한 뒤 “2 verre de vin blanche s’il vous plaît (화이트 와인 두 잔 부탁 드립니다)”하고 이지훈 씨가 직접 주문을 했다. blanc(블렁)을 blanche(블렁슈)라고 한 정도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 동안 불어도 열심히 공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잔을 부딪히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자 이지훈 씨는 자신의 난민인정 관련 서류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가 4년쯤 전에 받은 서류와 달라진 것이 없어서 글자를 자세히 읽을 필요도 없었다. 이지훈씨가 말했듯 난민이 인정되었음을 알리는 서류였다. 이제 그는 곧 10년체류증을 받을 것이다.
도쿄에서 안악희씨를 포함한 여러사람들과 만난 후, JPD는 내가 망명신청 때 제출한 서류와 프랑스 당국과의 연락 내용등을 베이스로 망명이 인정되는 판단기준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나의 병역거부가 망명사유로 받아들여진 사실이 한국에서도 보도되면서 프랑스 뿐만아니라 세계 각지로 나와 같이 망명을 시도한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쏟아졌다. 그 중에는 이미 망명이 인정되었지만 나와는 달리 스스로 밝히지 않았던 관계로 보도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냉정한 현실을 이야기하자면 망명에 실패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실패한 경우, 아직 여권기간이 남아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대로 재 신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JPD에서는 이들의 서류를 제공받아서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망명희망자에게 조언을 하였다.
내 자신도 유럽각국의 시민단체와 정당에게 초대받아 한국인 병역거부자들의 상태와 난민인정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UN인권위원회에 초대받아 한국정부대표에게 개선을 촉구하는 발표도 하였다.
그 사이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JPD의 조언을 받고 몇가지 국가로 떠난 상태다. 우리들이 파악하고 있는 이외에도 개인단위로 준비하여 국외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음을 작년말 한국정부발표에서 알 수 있다.
한국정부는 2016년 말부터 병역대상의 미귀국자들의 개인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남은 가족들에게 압력이 가해지지 않을까.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들에게도 특별사법경찰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런 배경속에서 지훈씨는 우리의 조언으로 보낸 사람들중에는 최초로 난민인정을 받은 사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나라이름과 자세한 정보는 밝힐 수 없지만, 추가로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수명 있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했듯 망명이란 방법에 대해 알리고자 2014년에 일본에 가서 외신클럽의 기자회견에 나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참 기쁜일이다. 한국내에서도 변화가 있다고 듣고 있다.
많은 난민신청 희망자가 파리로 와 있지만 의식주를 지인이나 친구 도움 없이 해결해 온 사람을 보는 것은 이지훈 씨가 처음이다. 그런 그는 지금 어느 한인숙박업소에서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고하는데, 일을 찾기 전에는 노숙도 했다고 한다. 파리에 도착후 난민신청자가 많아서 오랫동안 신청조차 못하다 2주 쯤 지났을까, 가지고 온 돈에는 한계가 있고, 초조해져 노숙을 결심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노숙자들이 사는 텐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SDF(sans domicile fixé)라고 써있다 ‘주거지 없음(는 사람)’쯤 된다
노숙을 시작하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혹시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의식주가 충분히 충족이 되고 당시 사귄 친구들은 만찬회에 맛 난 파티음식을 준비해서 초대하곤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주도 충족이 되고, 자신을 보다 잘 받아주고..충분히 공감되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힘든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숙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고 온 몸이 편치 못 해서 피로가 풀리지 않아, 필요 이상의 잠을 억지로 자곤 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했다. 인터뷰 중에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짓궂은 질문이 몇개 있었다고 하는데 이지훈 씨의 종교 대해 듣고 “크리스천은 그럼 모두 병역거부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의 주류 크리스천들은 오히려 군 의무를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언급하자면 이지훈 씨의 당혹스러움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쨋든 병역거부 사유 난민이 또 등장, 더군다나 아직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꺼려짐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권 개선에 같이 나서겠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한국의 현 정세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었는데 생각외로 ‘한국 사람들에게 기대도 없고 한국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같은 회의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한국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지 않나하고 생각한다. “내가 나로써 내 나라에 있고 싶을 뿐인데 그러려면 감옥에 가는 것과 여러 불이익을 감내 해야한다는게 말이 안 된다”고 말하며 분노와 서러움이 섞인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포기하고 나라를 떠나 난민신청을 한다는 것은 그 곳에서는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살 방법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이민자로 살아가야 할 이지훈 씨에게 내가 알고 있는 이민정보 및 이민자의 권리를 설명해주며 헤어졌다.
나무에게 일어난 일
-이지훈 씨의 난민인정을 주제로 얘기하고 싶었는데 나보다 그가 먼저 내 안부를, 정확히는 나무의 소식을 물었다. 나무와 우리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
나무가 ASE(Aide Sociale à l’Enfance) 어린이 사회보호단체<-이하 ‘아즈’> 라는 곳에 보내지게 되었었다. 나무를 출산한 병원이 우리가 아이에게 위험할 수 있는 부모라고 판단을 했고 신고를 한 것이다. ‘아즈’가 하는 일은 공식적으로는 여러가지 폭력에 노출 된 (물리적,심리적, 방치 등)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병원같은 기관으로부터든 익명의 제보자로 부터든 신고를 통해 절차가 진행 된다는 것이다. 절차에 들어가면 신고자의 말을 우선으로 긴 확인 과정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런 폭력적인 방식을 겪고 나니 아즈에 대해 좀 알아보게 되었는데 수용 된 아이들의 부모의 67%가 부당하고 원하지 않는 감금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사실 아즈도 아즈지만 난 출산을 한 pitié salepêtrier병원에 화가 난다. 그들이 우리를 신고한 근거는 크게 다음과 같다.
– 아이를 보러 3일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음
– 아기 아빠가 억압적
나무를 3일동안 보러 오지 않은 건 사실이다. 나무의 출산 예정일 전으로 휴가를 3주간 냈고 나무의 탄생부터 휴가가 끝날 때까지 방문시간(병원에서 잘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갔었다. 다만 휴가가 거의 끝나가던 차에 어머니와 동생이 오게 되었다. 한국을 떠난 후 4년만에 재회인데다가 체류일이 길지 않아서 병원에 갈 여유 시간을 쪼개서 만났다. 나무는 생물학적 부모만 들어갈 수 있는 신생아 실에(프랑스에서는 보통 산모와 같이 있어서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다)있었어서 병원 관계자들에게 가족들이 오기 몇주전부터 나무를 보러 들어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특별허가를 부탁했지만 결국 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덕분에 4년만에 만난 가족은 나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1시간도 되지 않았다. 규칙은 규칙이니 매정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이의가 있는 것은 내가 시간이 없어서 가족과의 방문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나무를 보러 오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충분히 설명을 했고 그것들에 대해 병원 관계자들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입장이었고 가끔 병원에 오지 않아도 자신들이 잘 돌보다가 특별한 일이 있다면 연락을 주겠다고까지 한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건 3일동안 아빠가 자기 애를 보러 오지 않았기에 위험한 부모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무의 엄마는 산후 우울증은 물론이고 신체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출산 직후라 서 있기도 힘든 때가 많았는데, 아이의 기저귀 갈기나 목욕 시키기등의 아이 돌보기를 보통 서서 해야 하기에 힘들 때가 많아 되도록 내가 아이 돌보기를 많이 맡으려고 했었다. 나중에 그들의 판단 근거를 아즈에서 듣게 되었는데 내가 배려 차원에서, 또 나무 아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한 그 행동들이 병원 관계자들의 눈에는 ‘아빠가 아이를 독차지 하려하고, 엄마가 엄마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하고 억압’한다고 판단 한 것이다.
병원에서는 산모를 철저하게 관찰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나무의 엄마도 그 관찰 대상이었고 간호사들이 의무적으로, 생각과 배려 없이 내 뱉는 우울증 관련 질문들에 힘들어했고 또 무서워했다. (프랑스에서는 산후 우울증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무 엄마에게 의무적으로 던진 질문 중에 누가봐도 심각한 것을 하나 적자면 나무의 성과 관련해서 던진 무식한 질문이다.
나무의 성은 내 애인의 성을 따라 박을 붙여 박나무다.
왜 아빠의(나의) 성을 붙이지 않았냐고 물으면서(애초에 누구의 성을 아이에게 붙이던 어떻게 붙이던 무슨 상관인가), “당신 두번째 부인이냐” 고 말한 것.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빠성을 붙이지 않아서 병원측에서 우리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즈를 통해 전해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를 부모자격이 없다는 듯이 판단하려 드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성을 아빠 성 안 붙였다고 인종차별 발언(엄마 성을 붙이다니, 당신들 유대인이냐), 프랑스 문화 우월주의 발언(프랑스는 아빠 엄마 성을 다 붙인다, 그럼 되지 왜 엄마 성만 붙이냐)들은 덜 떨어져서 하는 소리겠지만 우리가 한 행동들을 부분적으로만, 안 좋게 적어 둔 문서를 보게 됐다.
무책임하고 권위적인 병원에 화가 났지만 이번엔 나무가 강제수용 된 뒤 누군가에게 입양 되어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지나가진 않을 것이다.
liberté (자유)를 찾아서 살다보니 이 곳에 있지만 내 자유를 위해 맞서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다. 난민인정을 받은 이지훈씨도 한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이전과는 다른 불안함도 느낀다고 한다. 나도 무섭고 지치지만 계속해서 그것들에 맞설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끝 인사
독자분들에게,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쓸 욕심은 여전히 있지만 능력이 욕심을 따라가지를 못 해서 연재를 1년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 글을 남기며 감사하단 말을 드립니다.
매거진 9 여러분들에게도 부족한 저에게 칼럼을 연재할 공간을 마련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리뉴얼 되는 매거진 9 기대 됩니다.
또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모두 건강하세요!
2014年、雨宮処凛さんが連載のなかで紹介したことをきっかけに、この連載は始まりました。「自由のために立ち向かわなくてはいけない」というイェダさん。徴兵の問題だけでなく、フランスでの生活に対する視点からも、さまざま考えさせられることがあります。まだまだ聞きたいことが沢山ありますが、またぜひ機会をつくってお話を伺いたいと思います。